B단조 미사, BWV 232 — 바흐의 마지막 작품, 혹은 미래의 작품

Messe h-moll, BWV 232

1. 서문

“모든 시대와 인종을 뛰어넘는 가장 위대한 음악작품” — Ankündigung des größten musikalischen Kunstwerks aller Zeiten und Völker

이 유명한 말은 1818년에 출판업자 한스 게오르크 내겔리(Hans Georg Nägeli)가 B단조 미사 악보의 예약판매를 광고하면서 했던 말이다. 내겔리는 B단조 미사 악보 출판을 처음으로 계획한 사람이다.

흥미롭게도 내겔리 시대까지 B단조 미사는 전부 연주되지도 않았고 사실 어떻게 연주하는지도 잘 몰랐다. 원전에 대한 연구는 아주 부족했다. 내겔리가 계획한 악보는 아직 준비 중이었으며 그나마도 완전한 총보는 내겔리가 죽을 때까지 출판되지도 못했다. 따라서 저 유명한 인용문은 그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광고문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20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뛰어난 바흐 학자들이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물론 그 결론은 수많은 고민과 연구를 거쳐 왔기에 문자 그대로는 똑같지만 느껴지는 무게감이 전혀 다르다.

바흐가 작곡한 수많은 다른 걸작들과 마찬가지로 B단조 미사도 제대로 이해되기까지 힘든 여정을 거쳐 왔다. 첫 번째 악보를 출판하면서 내겔리 부자와 바흐 협회 사이에 벌어진 알력싸움은 초기의 작은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다. B단조 미사의 기원이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작품을 이해하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충분히 납득이 간다.

바흐가 B단조 미사를 왜 작곡했는지, 언제 작곡했는지, 작품이 무엇을 의도했는지, 어떻게 연주했는지 여전히 정확히 알지 못한다. 더 나아가 애시당초 완전한 한 작품으로 기획되었는지, 또 실제로 연주되었는지조차 우리 손에 쥐어진 답은 하나도 없다.

단언하건대 B단조 미사는 음악사상 가장 논쟁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존 버트(John Butt)가 지적한 것처럼 B단조 미사에 대한 수많은 연구와 열정적인 논쟁들은 바흐 작품의 영속적인 가치를 웅변하고 있다.

2. 미사 — 영원한 장르

모든 기독교를 통틀어 최후의 만찬, 즉 성찬예식을 재현하는 것은 가장 중요하고 엄숙한 의식이다. 성찬 예식은 시대와 종파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으며 다양한 형식으로 예배 활동의 핵심을 이루었다. 라틴어 ‘Missa’가 가톨릭 성찬예식의 일반적인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은 다소 놀라운 일인데 왜냐하면 그 어원이 미사가 끝날 때 하는 말인 ‘Ite missa est’(가십시오, 헤어집시다)에서 왔기 때문이다. 4세기까지는 본래의 의미로 사용된 듯하나 5세기부터는 신성한 예배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초기 로마 교회의 미사는 오늘날과 매우 다른 형태였는데 서기 1000년이 되기 전에 본래 미사에는 없었던 키리에(Kyrie)와 글로리아(Gloria)가 포함되었고 1000년경에는 가톨릭 미사가 확립되었다.

미사는 교회력의 절기에 따라 매일 성가가 바뀌는 미사 고유문(Proprium Missae)과 가사가 바뀌지 않는 미사 통상문(Ordo Missae)으로 구성된다. 미사 통상문이 처음부터 음악적인 통일성을 고려한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미사 통상문에 속하는 다섯 개의 성가 키리에(Kyrie), 글로리아(Gloria), 크레도(Credo), 상투스(Sanctus), 아뉴스 데이(Agnus Dei)는 음악적으로 아주 중요해졌다.

중세 말의 작곡가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는 처음으로 미사 통상문 전체를 다성 음악으로 작곡하여 음악사에 잊혀지지 않을 이정표를 세웠다. 뒤이어 르네상스 시대의 기욤 뒤파이(Guillaume Dufay), 조스캥 데 프레(Josquin Des Prez), 팔레스트리나(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 등을 거치면서 다성 미사는 전성기를 맞이한다.

종교개혁과 반동종교개혁의 열풍 속에서 바로크 시대의 미사는 다양한 양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시대가 요구하는 음악은 전혀 새로운 것이 되었지만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같은 인물은 여전히 옛 양식으로 미사를 작곡했다. 그런가하면 잘츠부르크의 비버(Heinrich Ignaz Franz Biber)는 상상을 초월하는 초거대 미사로 가톨릭의 위용을 드러낸다.

18세기 초 이탈리아 작곡가들은 미사의 다섯 악장을 세분화하여 다성부 합창과 함께 오페라를 연상시키는 독창이나 이중창으로 악장을 구성했다. 그리고 막 가톨릭으로 개종한 드레스덴 선제후는 미사와 함께 많은 이탈리아 작곡가들을 받아들였으며 드레스덴 궁정의 종교음악 작곡가들, 하이니헨(Johann David Heinichen)과 젤렌카(Jan Dismas Zelenka)는 나폴리 미사를 연구하고 발전시켰다.

한편 개신교 가운데 루터파는 교황 중심의 교리를 개혁하려고 했지 예식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키리에와 글로리아로 구성된 축소된 형태의 미사는 여전히 루터교 지역에서 작곡되고 불렸다.

바흐가 B단조 미사를 작곡한 배경에는 이와 같은 다양한 모습이 깔려있다. 1733년 바흐가 새로 즉위한 드레스덴 선제후 아우구스트 2세(Friedrich August II)에게 드레스덴 모델로 작곡한 키리에와 글로리아를 헌정한 것은 헌정 미사의 정치적인 의도를 분명히 하면서 종교적으로도 명분이 서는 일이었다. 게다가 헌정 미사는 규모, 형식, 난이도 측면에서 드레스덴 궁정악단에 걸맞은 실용적인 것이다. B단조 미사의 풍부한 양식이나 수준 높은 음악성 무엇보다도 압도적인 힘은 이미 드레스덴 헌정 미사에서 완성되어 있다.

바흐가 살아있을 때에 미사는 이미 1,000년 이상의 전통을 지닌 장르였고 양식 혼합적이고 국제적이었다. 게오르크 폰 다델젠(Georg von Dadelsen) 그리고 고바야시 요시타케(小林義武)의 연구에 의해 B단조 미사는 바흐가 직접 쓴 최후의 작품으로 자리매김한다. 바흐는 옛 작곡가 중에서 작품의 영속성을 고민한 드문 작곡가이다. 바흐는 마음에 드는 부분을 계속 재사용했으며 소수의 작품을 끊임없이 갈고 닦았다. 노년의 바흐가 자신의 모든 사상과 기술을 투영할 보편적이고 영속적인 수단으로 변주곡, 카논, 푸가 다음에 미사 전곡(Missa tota)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귀결일 지도 모른다.

3. B단조 미사의 기원

가톨릭 미사 통상문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키리에, 글로리아, 크레도, 상투스, 아뉴스 데이의 다섯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그런데 바흐의 미사는 구성이 조금 다르다. 바흐는 키리에와 글로리아를 제 1부 미사로 묶고 제 2부는 니케아 신경, 제 3부는 상투스, 제 4부는 오산나-베네딕투스-아뉴스 데이-도나 노비스 파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독특한 구성은 미사의 주요 부분이 다른 시기에 작곡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 바흐 전집(Neue Bach Ausgabe)에서 B단조 미사를 악보를 편집한 프리드리히 스멘트(Friedrich Smend)는 미사 전체를 한 작품으로 보는 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음악사상 가장 위대한 미사라는 19세기적 환상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물론 스멘트의 주장은 폰 다델젠 등에 의해 즉각 반박되었고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흐가 완성된 미사 전체를 의도했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멘트의 주장은 내겔리 이후 낭만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원전에 근거한 엄밀하고 비평적인 연구에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724년 크리스마스에 처음 연주된 상투스는 미사 전체와는 독립적으로 작곡되었다. 키리에와 글로리아는 1733년 드레스덴 선제후에게 헌정되었으며 미사 전체로 묶을 때 부분적으로 개작되었다.

헌정 미사에는 다소 복잡한 사연이 있다. 라이프치히 칸토르(Kantor)로서 시 당국 및 대학과 갈등을 빚어 온 바흐는 정치적인 타개책으로 라이프치히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막강한 드레스덴 궁정을 떠올렸다. 드레스덴은 가톨릭이었지만 바흐와 상당히 인연이 깊은 도시이다.

오래전 젊은 바흐는 드레스덴에서 콧대 높은 프랑스인 루이 마르샹(Louis Marchand)과 하프시코드 연주를 겨뤄 승리하여 독일 음악가들의 체면을 세워준 바 있다. 바흐는 선제후 부자를 위한 축전 칸타타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Friedrich August des Starken)의 선제후비 크리스티아네 에버하르디네(Christiane Eberhardine)를 위한 추모 칸타타 등을 작곡했고 드레스덴 궁정악단에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래서 바흐가 드레스덴을 고려하여 헌정 미사를 작곡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결과 1736년 바흐는 작센 선제후 궁정작곡가라는 이름뿐이지만 상당히 효과 있는 직위를 하사 받게 되었다.

바흐는 1733년 미사 헌정 이후 라틴어 종교음악 특히 미사라는 장르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다. 묘하게도 이때는 종교 칸타타를 집중적으로 작곡한 1720년대 이후 칸타타 작곡이 뜸해진 시기와 일치한다.

바흐는 연주하기 위해 또 공부하기 위해 드레스덴과 이탈리아의 미사 소스를 광범위하게 수집했다. 드레스덴 음악가들은 오래된 르네상스 다성미사도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를 통해 바흐는 옛 작법에 완전히 통달하게 된다. 바흐 음악 애호가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바흐는 심지어 팔레스트리나의 Missa sine nomine를 모두 사보하고 키리에와 글로리아에 기악을 중복하여 연주한 적도 있다.

B단조 미사 작곡 전체에 걸쳐 바흐와 드레스덴의 끈끈한 유대관계는 아주 중요하다. 바흐는 여러모로 드레스덴 음악가들과 구체적으로 접촉했다. 특히 얀 디스마스 젤렌카는 바흐처럼 대위법의 대가로서 옛 양식과 새 양식의 통합원리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게오르게 슈타우퍼(George Stauffer)는 드레스덴 미사와 바흐 미사와의 관계를 다양한 예를 들어 실증한 바 있는데 드레스덴 미사에 대한 앞으로의 연구는 젤렌카, 하이니헨, 하세(Johann Adolph Hasse)는 물론 바흐 B단조 미사 연구에도 빛이 될 것이다.

상투스와 헌정 미사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 이전에는 작곡시기가 1730년대로 생각되었으나 폰 다델젠은 1740년대로 추정했고, 고바야시 요시타케는 필적 연구를 통해 크레도, 상투스, 아뉴스 데이 부분이 바흐가 시력을 완전히 잃기 직전인 1749년까지 작업되었음을 밝혀냈다. 종전에는 푸가의 기법이 바흐의 마지막 대작으로 여겨졌으나 B단조 미사는 그보다 더 늦은 시기까지 더 오랫동안 전심전력을 다한 작품이다.

B단조 미사 악장의 많은 부분은 이전에 작곡한 종교 칸타타 및 세속 칸타타 악장의 패러디이다. 패러디의 소스는 매우 다양한데 원곡이 밝혀진 것도 있으나 현재는 분실된 작품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있다.

전용 내지는 패러디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낱알처럼 흩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의도 아래 견고하게 응축된 느낌을 준다. 바흐는 미사라고 하는 시대와 종교를 초월한 장르에 모든 작곡기법과 다양성을 수용하려고 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패러디 된 작품의 원래 의미와 B단조 미사와의 연관관계를 밝히는 것도 현재 B단조 미사 연구의 중요한 과제이다.

4. B단조 미사의 구성

제 1부 미사는 키리에와 글로리아로 구성되어 있다. 키리에는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 키리에는 세 번에 걸친 키리에의 압도적인 외침으로 시작하여 리토르넬로가 숨겨진 푸가로 전개된다. B단조 미사를 특징짓는 이 독특한 도입부는 드레스덴 미사 모델에는 없지만 바흐가 필사한 만하임의 카펠마이스터 요한 휴고 폰 빌더러(Johann Hugo von Wilderer)의 g단조 미사나 젤렌카가 연주한 칼다라(Antonio Caldara)의 미사 등 몇 가지 바흐가 참고할 수 있었던 예는 몇 가지가 있다.

드레스덴 작곡가들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소프라노 2중창을 위한 크리스테 엘레이손은 서정적이면서 또한 기교적이다. 헌정 미사의 기교적인 아리아들은 분명히 파우스티나 보르도니(Faustina Bordoni, 하세의 부인이자 탁월한 헨델 가수) 같은 드레스덴의 숙련된 오페라 가수들을 염두에 두고 작곡했다.

두 번째 키리에는 반음계적 주제를 갖는 엄격한 4성부 푸가이다. 드레스덴 작곡가들 역시 두 번째 키리에에 푸가를 즐겨 사용했다. 특히 젤렌카의 후기 작품인 Missa Sanctissimae Trinitatis 가운데 두 번째 키리에의 반음계적 주제는 바흐와 유사하다. 그런데 역시 바흐가 연주한 바 있는 친척 요한 루트비히 바흐의 Missa brevis 두 번째 키리에 주제도 특징적인 반음계로 아마 바흐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젤렌카가 바흐의 작품을 연구했는지 혹은 젤렌카와 바흐가 같은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는지는 불분명하다.

화려한 글로리아는 D장조로 단조인 키리에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글로리아는 8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글로리아 악장은 ‘Gloria in excelsis deo’와 ‘et in terra pax’ 두 부분으로 나뉘므로 음악적으로는 아홉 부분이다. 글로리아는 합창과 함께 바이올린, 오보에 다모레, 플루트, 호른 등 여러 가지 악기의 오블리가토 반주가 붙는 독창, 2중창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곡도 겹치지 않는 악기 구성과 독창자 구성은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연상시키는데 이는 세상의 모든 소리가 주님을 찬양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Quoniam’에서 호른의 사용이 특히 돋보이는데 하이니엔의 미사에서도 훌륭한 호른 용법을 볼 수 있지만 바흐의 경우는 홀로 ‘높으신’ 주를 찬양하기 위해 베이스 독창과 호른, 두 대의 바순을 사용한 점이 흥미를 자아낸다. 바흐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동시대의 일반적인 악기 구성을 전복하는 경우가 있는데 젤렌카가 Missa Sanctissimae Trinitatis의 ‘Quoniam’에서 소프라노와 플루트를 사용한 것과 비교해 보면 좋을 것이다.

제 2부 니케아 신경은 B단조 미사의 전체 중에서 정교한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합창 ‘Crucifixus’를 중심으로 예수의 탄생, 죽음, 부활을 옛 양식의 합창곡과 독창 등을 대칭적으로 구성했다. 그 악장의 구성에는 아름다운 조형적, 논리적 미감에 수비학적 상징이 풍부하게 반영되어 있다. 여기에 비견할 만한 것은 젤렌카의 미사 Omnium Sactorum Ultimarum Sexta의 크레도인데 단일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옛 양식의 성악 푸가로 된 ‘Crucifixus’를 중심으로 기악 리토르넬로가 있는 변형된 다 카포 형식으로 대칭적 균형미를 갖추고 있다.

제 3부 상투스는 단일 악장인데 프랑스 우베르튀르(Ouverture)의 2부 구성으로 되어 있다. 첫 부분은 장중하며 ‘Pleni sunt coeli terra gloria tua’(하늘과 땅에 영광이 가득하도다)에 이르면 정교한 6성 합창 푸가로 발전해 나간다.

제 4부 오산나-베네딕투스-아뉴스 데이-도나 노비스 파쳄에는 서정적이고 심오한 아름다움이 담겨있다. 플루트 오블리가토와 테너 독창에 의한 관능적인 베네딕투스, 침착한 현악 반주위의 호소력 넘치는 알토 아리아 아뉴스 데이는 B단조 미사 가운데 특히 아름다운 아리아로 꼽힌다. 도나 노비스 파쳄의 선율로 글로리아의 ‘Gratias agimus’를 인용하고 있는데 곡에 통일성을 주기 위해 같은 미사에서 인용하는 것은 드레스덴 작곡가들에게도 찾아볼 수 있는 습관이다. 이는 또한 바흐가 제 1부 미사부터 마지막 4부 도나 노비스 파쳄까지 별개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5. B단조 미사의 연주사와 연주관습

바흐 생전에 B단조 미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된 적이 없다. 1733년 헌정 미사는 라이프치히나 드레스덴에서의 연주 가능성이 끊임없이 제기되었으나 확증할 만한 자료가 없다. 상투스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1724년 연주되었고 이후에도 몇 번 더 연주되었지만 니케아 신경을 비롯한 후반부 대부분은 악보로만 전해졌다.

바흐 사후 중요한 연주 기록은 B단조 미사의 총보를 상속받은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Carl Philipp Emanuel Bach)가 1787년 자선 연주회에서 자신의 작품 함께 니케아 신경을 지휘한 것이다. 이 연주회는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켜 이후 ‘크레도 열풍’이라고 할 정도로 니케아 신경은 자주 연주되었다.

그 즈음 여러 경로(주로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와 다른 대 바흐의 제자들)을 통해 B단조 미사의 일부가 동시대에 알려지게 된다. 고트프리트 판 스비텐 남작(Gottfried van Swieten)은 베를린을 경유한 필사본을 소유했는데 이를 통해 빈 고전파 작곡가들에게도 B단조 미사가 알려졌다. 베토벤은 장엄미사 작곡을 위한 자료로 신뢰할 만한 B단조 미사의 총보를 입수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한참 뒤에야 출판업자 내겔리와 짐로크가 첫 번째 현대 판본을 출판했다.

한스 게오르크 내겔리는 칼 필립 에마누엘의 유산에 포함된 바흐의 자필 총보를 입수해 1818년 예약출판 광고를 냈으나 작업은 매우 더뎌서 1833년 키리에와 글로리아가, 1845년 한스 게오르크 내겔리가 죽은 뒤 아들 헤르만 내겔리가 나머지 악보를 출판했다. 뒤이어 바흐 협회(Bach Gesellschaft)가 우여곡절 끝에 출판한 바흐 협회판(1856–57년)은 신바흐협회 판본이 나오기 전까지 가장 중요한 악보로 한 세기 동안 B단조 미사 연주의 중요한 소스가 되었다.

프리드리히 스멘트가 편집한 신바흐협회 판본(1954년)은 이전 바흐협회 판본을 완전히 대체하기 위한 결정판으로 계획되었으나 오히려 스멘트의 획기적인 주장이 엄청난 논란만을 불러왔을 뿐이다. 이는 바흐의 다양한 원전을 모든 관점에서 철저하게 재조사 하는 본격적인 연구를 촉발시켰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수백의 성악가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B단조 미사는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우리가 지금 흔히 들을 수 있는 바흐에 알맞은 적절한 규모와 정교함으로 연주하게 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19세기적인 거대주의에 반발하여 20세기 초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아르놀트 쉐링(Arnold Schering), 찰스 샌포드 테리(Charles Sanford Terry) 등은 바흐가 원래 의도한 편성과 음향에 관심을 가졌다. 그 결과 요즘은 스무 명 남짓한 합창단과 비슷한 규모의 오케스트라로 미사를 연주하게 되었고 이 정도의 규모가 바로크 음악을 연주하는 통상적인 편성이 되었다. 그리고 1968년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Nikolaus Harnoncourt)가 B단조 미사 연주에 처음으로 완전한 시대악기 오케스트라를 적용했다.

그런데 바로크 연주관습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소위 리프킨설이라는 것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바흐의 성악 작품은 최소편성 다시 말해서 성부 당 한명으로 연주한다는 주장으로 미국 지휘자이자 음악학자인 조슈아 리프킨(Joshua Rifkin)이 B단조 미사 연주(1981–82)에 실제로 적용하면서 유명해졌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주장을 리프킨이 처음 한 것은 아니고 빌헬름 루스트(Wilhelm Rust)와 아르놀트 쉐링은 옛 음악의 합창파트가 한결같은 합창이 아니라 콘체르티노와 리피에노로 구성된다는 점을 발견했고 게르하르트 헤르츠(Gerhard Herz)와 빌헬름 에만(Wilhelm Ehman)은 이를 이론적으로 구체화 시켰으며 에만과 로버트 쇼(Robert Shaw)는 실제 연주에 적용했다. 리프킨은 여기서 더 나아가 완전한 최소편성을 시도했으며 정교한 시대악기 연주와 결합하여 음악적으로 들을 만한 연주를 빚어냈다는데 의의가 있다.

리프킨의 주장은 곧장 논쟁에 불을 지폈는데 그 지지자들과 반대론자들은 여전히 논문과 음악잡지를 통해 설전을 벌이고 있다. 지휘자인 앤드류 패롯(Andrew Parrot)과 지기스발트 쿠이켄(Sigiswald Kuijken) 그리고 음악학자인 존 버트는 리프킨을 지지한다. 반면 레온하르트(Gustav Leonhardt), 코프만(Ton Koopman), 헤레베헤(Philippe Herreweghe) 플랑드르 3인방은 통상편성을 지지하며 그 배후에는 음악학자 크리스토프 볼프(Christoph Wolff)가 있다.

역사적으로 최소편성의 증거는 상당히 많다. 이를테면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는 1787년 니케아 신경을 최소편성으로 연주했다. 그는 수백 명을 동원해 헨델의 메시아를 연주한 사람이다.

그러나 통상적인 합창 편성을 지지하는 것도 납득이 가는 부분이다. 무엇보다도 음반이 아닌 실제 교회나 연주회장에서 최소 편성으로 밸런스를 유지하며 충만한 소리를 이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필립 헤레베헤는 두 번의 레코딩에서 다른 플랑드르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성부 당 셋 혹은 넷으로 구성된 합창를 지지한다. 그는 첫 번째 녹음(1988, Virgin veritas)에서 소프라노1 4, 소프라노2 3, 알토 4, 테너 5, 베이스 5로 합창단을 구성했고 두 번째 녹음(1997, harmonia mundi france)도 근본적인 해석과 편성은 크게 다르지 않다.

구스타프 레온하르트가 소년 합창을 쓴 것과 달리 헤레베헤는 오늘날의 소년 합창단이 바흐 음악이 요구하는 기술과 소리를 만족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프라노는 여성을 알토는 여성 알토와 카운터테너를 섞어 쓰는 절충 연주를 주장했다. 마침내 헤레베헤는 매우 세련되면서도 신실한 감정과 인간적인 따뜻함이 조화를 이룬 멋진 합창을 이끌어 냈다. 합창을 콘체르티노와 리피에노로 나누진 않았지만 니케아 신경의 Et resurrexit 가운데 et iterum 부분은 베이스 독창으로 불렸으리라는 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편성 이외에도 연주 실제 측면에서 아직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이를테면 몇몇 악장은 어떤 템포로 연주해야 하는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Domine deus’의 플루트 파트에 있는 갈랑트 양식에서 특징적인 롬바르드(역부점) 리듬 같은 세부적인 부분에서 헌정 미사와 미사 총보 그리고 다른 미사 필사본이 조금씩 차이가 있다. 결정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원전을 꼼꼼하게 연구하되 결국 어떤 해석을 취할 것인가는 순전히 연주자의 예술적 선택에 달려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유일무이한 해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카오스 속에서 모든 해석이 분출된다. 그 가운데 뛰어난 해석이 분명히 있지만 모든 측면에서 만족스럽다고 할 수는 없다. B단조 미사처럼 복잡하고 거대한 작품에 대한 결정적인 해석은 가능하지도 않고 올바르지도 않다. 모든 접근 방법은 작품의 단면만을 보여줄 뿐이다. 때문에 이미 수많은 B단조 미사의 음반과 연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음악가들은 이 음악사의 도달 불능점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다.

6. B단조 미사의 의미

과연 대 바흐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랫동안 미사에 매달린 것일까. 1733년의 헌정 미사를 미사 전곡으로 확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흐가 특정한 목적을 위해 B단조 미사를 작곡했다는 설이 한동안 유행한 바 있다. 이를테면 어떤 주장에 따르면 1733년의 헌정 미사에서 단조인 키리에는 선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를 추모하는 작품이며 장조인 글로리아는 새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를 찬양하는 작품이다. 한편 미사 전곡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을 위한 또 다른 음악의 헌정이라는 설, 미츨러(Lorenz Christoph Mizler)의 음악학협회를 위한 작품이라는 설 등이 있다.

무엇보다도 흥미를 끄는 것은 바흐가 B단조 미사를 완성할 즈음 완공단계에 있었던 드레스덴의 새 궁정교회를 위한 기념작품이라는 설이다. 실제로 드레스덴의 새 교회는 바흐가 죽은 직후인 1751년 완공되었으며 낙성식에서 하세의 미사가 연주되었다. 이 설은 그럴 듯 하지만 B단조 미사 자체가 예배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작품 치고는 너무 길다. 이를테면 젤렌카의 마지막 미사곡들도 다른 드레스덴 미사에 비해 길지만 그래도 한 시간 남짓에 불과하다.

바흐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B단조 미사를 작곡했다는 가설들은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긴 하지만 미사 전체를 좁은 목적에 가둬놓는 것은 위험하다. B단조 미사는 부분적으로는 실용적이다. 상투스나 1733년의 헌정 미사 그리고 바흐 사후에 연주된 니케아 신경을 보라. 그리고 B단조 미사를 구성하는 다양한 음악적 요소는 루터파 교회의 실질적 요구에 의해 작곡된 작품이다. 그러나 전체로는 매우 추상적이며 이상적이다. B단조 미사는 작곡 당시에 이미 시대와 장르를 초월했다.

세속 칸타타로부터 패러디한 미사 악장은 세속과 종교의 경계를 허문다. 미사 전곡은 가톨릭의 표상이지만 미사의 구석구석에는 루터파 개신교의 특징이 녹아들어 있다. 바흐는 의도적으로 가톨릭 미사의 라틴어 가사를 루터파에서 쓰는 가사로 바꿔놓았다. 또한 ‘Quoniam’이나 ‘et iterum’에서처럼 루터파 수난곡과 칸타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를 상징하는 베이스 성부를 중요하게 사용했다.

양식적으로는 그레고리오 성가에서 르네상스 다성음악을 거쳐 최신의 갈랑트 양식까지 포용하고 있다. 가장 엄격한 대위법 악장에서도 이탈리아에서 유래한 리토르넬로 원리와 전통적인 통모방기법이 균형을 잡고 있다. 바흐의 미사에는 나폴리, 드레스덴, 라이프치히의 지역적 특성이 완벽하게 혼합되어 있다.

물론 혼합양식은 바흐가 독점한 것이 아니며 여러 양식의 혼합은 18세기 중반 독일 작곡가들의 일반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융합하여 자신만의 투철한 종교적, 미적 사상을 반영하여 누가 들어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그런 작품을 쓴 사람은 많지 않다. 바흐는 모든 음악의 뿌리에서 출발하여 종파적, 지역적, 양식적 한계를 돌파했다. 이것이 가톨릭을 위한 작품이냐 개신교를 위한 작품이냐라는 편협한 논쟁은 작품의 가치를 고려할 때 실로 무의미 하다.

바흐는 모든 특수성과 보편성을 시대를 초월한 미사 통상문이라는 양식에 담았다. B단조 미사는 평생에 걸친 바흐의 기술 그리고 바흐 시대에 가능했던 모든 양식, 음악 어법, 작곡 기법의 철저한 완성체이다. 바흐는 한곡 한곡에 완전히 다른 편성, 양식, 구조를 적용시키면서 전체적으로의 질서정연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갔다.

그리고 바흐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음악의 궁극적 또는 최종 목표는 오로지 신의 영광과 영혼의 재창조를 위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바흐가 매 작품마다 S.D.G.(Soli Deo Gloria) 혹은 D.S.G.(Deo Soli Gloria)로 끝맺은 이유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여기에 나타나는 음악적인 질서라고 하는 개념은 바흐가 갖고 있었던 칼로프(Abraham Calov) 성경의 역대상 제28장 21절 “모든 지휘관과 백성이 온전히 네 명령 아래에 있으리라”의 여백에 바흐가 달아놓은 주석으로 잘 알 수 있다: “다른 예배와 같이 음악도 신에 의해 다윗을 통해 질서있게 된 것과 다름없다.”

B단조 미사에 숨겨진 끝없는 의미는 수많은 논쟁 가운데 새로이 발견되고 있다. 미사는 바흐가 죽은 후 오히려 독자적인 생명력을 얻었다. 미사의 연주사는 복잡하고 혼란스럽지만 그와 함께 바흐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더욱 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B단조 미사에 대한 연구와 해석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서 B단조 미사는 바흐의 마지막 작품이지만 과거에 머문 작품이 아닌 미래를 위해 준비된 작품이다.

최지영,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