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뒤플리, 그리고 파리의 마지막 클라브생 살롱
올리비에 보몽이 그려낸 18세기의 음악적 초상화집
1866년 10월, 공쿠르 형제(Edmond, Jules de Goncourt)는 프랑스 북부 생캉탱(Saint-Quentin)으로 향한다. 마우리스 캉탱 드 라 투르(Maurice Quentin de La Tour)의 파스텔 초상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형제는 그날의 인상을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생캉탱 미술관에 들어선 우리의 첫 인상 — 라 투르의 파스텔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라 삶 그 자체였다. 그 머리들이 갑자기 우리 쪽으로 돌아서고, 모든 눈동자가 우리를 바라보며, 이 큰 갤러리에서 우리는 — 모든 입이 막 다물어진 — 한창 대화 중이던 18세기를 방해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같은 인상은 자크 뒤플리(Jacques Duphly, 1715–1789)의 음악을 들을 때에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그는 친구·친지·동료·후원자들에게 자신의 클라브생클라브생 (clavecin)하프시코드의 프랑스 이름. 18세기 프랑스에서는 ‘클라브생’이 표준이고 ‘하프시코드’는 영어 어휘다. 깃펜으로 현을 뜯는(plucked) 건반악기로, 음량 단계가 없는 대신 두 단의 키보드와 stop으로 음색을 바꾼다. 곡들을 헌정하며 그들을 음악 속에 새겨 넣었다. 가령 《클라브생 곡집 3권》의 라 드 라 투르(La de La Tour)는 라 투르 화가 본인에게 헌정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파스텔과 클라브생은 모두, 화려함과 예리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무한한 섬세함과 무한한 다정함을 그 초상에 부여한다. 18세기 프랑스의 정제된 살롱 사회는, 이보다 더 나은 자기 기념물을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뒤플리에게서 “한창 대화 중이던 18세기”는 — 그것도 얼마나 재치 있는 대화였는가! — 연주자와 청자가 그 음악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마다 다시 살아난다.
교회에서 살롱으로 — 루앙의 오르가니스트가 파리의 클라브사니스트가 되기까지
뒤플리는 1715년 1월 12일 루앙에서 태어났다. 같은 노르망디 도시는 일찍이 프랑수아 다쟁쿠르(François d’Agincourt, 1684–1758)와 미셸 코레트(Michel Corrette, 1707–1795) 같은 클라브사니스트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어머니 마리-루이즈 부아뱅(Boyvin)은 오르가니스트 자크 부아뱅의 딸이었으니, 음악적 혈통은 외가 쪽에서 이어진 셈이다. 동시대 평론가 다캥 드 샤토-리옹(d’Aquin de Château-Lyon)은 1754년 책에서 그를 “다쟁쿠르의 제자”라 명기했다.
1732년경 에브뢰(Évreux)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지만 곧 사임하고 루앙으로 돌아온다. 이후 그는 1734년 9월부터 생-엘루아 교회를 시작으로, 카르멜 수도원, 생-루이 베네딕트 교회, 노트르담-라-롱드 교회 등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오르가니스트로 일하며 보케 양(Mademoiselle Boquet) 같은 학생들에게 오르간을 가르쳤다. 흥미롭게도 생-엘루아 교회에서 그의 전임자는 후임에게 오르간 열쇠를 넘겨주기를 거부했다. 작은 규모의 직책이지만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했던 한 음악가의 모습이 짐작된다.
1742년 5월 22일, 뒤플리는 생-엘루아의 직을 누이 마리-안 아가트에게 넘기고 파리로 떠난다. 이후 그는 사실상 고향에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
파리에서의 그는 완전히 다른 길을 택했다.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 살롱이었고, 더 이상 오르간이 아니라 오직 클라브생이었다. 17·18세기 유럽 건반 음악사에서 이는 매우 드문 선택이었다. 1754년 마르푸르크(F.W. Marpurg)는 베를린에서 출간한 자신의 잡지에 “뒤플리는 손을 다치지 않으려고 클라브생만 친다”고 적었다. 왕실에 직책이 없었던 그가 살아가는 방법은 단 두 가지였다 — 귀족과 부유한 부르주아에게 레슨을 하고, 사적인 콘서트에 참여하는 것.
당시 가장 권위 있는 살롱 중 하나가 마담 뒤알레(Madame Duhallay)의 모임이었다. 티통 뒤 티예의 기록에 따르면 그곳에서는 “바티스트, 캉탱, 망종, 프티가 바이올린을, 블라베와 타이야르가 플루트를, 롤랑 마레와 드 카가 비올라 다 감바를, 라모, 다캥, 뒤 플리츠(Du Flitz)가 클라브생을 연주했다.” 다캥 드 샤토-리옹은 마담 뒤알레가 “이탈리아 가곡을 더없는 취향과 섬세함으로 노래했고, 클라브생을 연주했으며, 그녀의 집은 예술가들의 만남의 장이었다”고 부언한다. 82세의 라르질리에르(Largillière)가 그녀의 초상을 그렸을 정도다.
동시에 뒤플리는 루이 드 누아유(Louis de Noailles, 후일 4대 누아유 공작)의 인정을 얻는다. 노련한 궁정인이자 루이 15세에게 신임받은 그는, 1757년 다미앙의 국왕 암살미수 사건 당시 왕의 곁에 있었던 인물이다. 좋은 목소리를 가진 아마추어 음악가이기도 했던 누아유는 1747년부터 베르사유와 벨뷔에서 마담 드 퐁파두르가 주도한 프티 자파르트망 극장에 참여했다. 1744년 뒤플리는 자신의 첫 《클라브생 곡집》을 바로 이 인물에게 헌정한다.
1744 · 1748 · 1756 · 1768 — 네 권의 곡집
뒤플리가 남긴 모든 것은 결국 네 권의 《클라브생 곡집(Pièces de Clavecin)》이다. 24년에 걸친 출판의 간격은 점점 벌어지고, 곡집의 어법은 점차 변화한다.
《클라브생 곡집》 1권 (1744)
스물아홉의 작곡가는 베르리 거리의 코크 거리 쪽 출입문 맞은편에 살고 있었다. 같은 거리에는 파리의 클라브생 제작 명가 블랑셰(Blanchet) 가문도 있었으니, 두 사람이 만나지 않았을 리 없다.
1744년이라는 해는 의미심장하다. 프랑수아 쿠프랭은 11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마지막 곡집은 1730년이었다. 라모는 1747년 라 도핀을 제외하면 클라브생을 사실상 떠나 오페라와 이론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빈자리를 이어 수많은 작곡가가 파리에서 곡집을 발표하던 시기 — 즉, 루이 15세 치하 프랑스 클라브생 학파가 그 정점에 다다른 시기였다. 새로 등장한 음악가가 주목받기는 결코 쉽지 않은 풍경 속에서, 뒤플리는 그저 악상의 정련도와 작법의 완성도로 애호가들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두 모음곡 — D 단/장조와 C 단/장조 — 이 책 전부를 이룬다. 알르망드알르망드·쿠랑트모음곡의 첫 두 춤. 알르망드(allemande)는 독일 기원의 진중한 4박자, 16분음표의 흐름이 양손을 끊김 없이 채운다. 쿠랑트(courante)는 3박자 — 프랑스식은 style luthé(류트 양식)의 점진적 화성 풀이로 느리게, 이탈리아식 corrente는 분산음으로 빠르게 흐른다.와 쿠랑트, 미뉴에트, 지그 같은 전통적인 모음곡 춤들이 살아 있지만, 그것들 사이사이에 La Vanlo, La Tribolet, La Damanzy, La Cazamajor 같은 음악적 초상들이 자리 잡는다.
D 단조 알르망드는 17세기 알르망드의 풍요로운 울림 대신, 유려하고 유연한 —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 새로운 결을 보여준다. 고결한 귀족적 톤에서 비할 데 없이 정련된 우아함으로의 전환. 이것이 1740년대 프랑스 클라브생의 새로운 어법이었다. (참고로 같은 시기 평론가 다캥 드 샤토-리옹이 뒤플리의 연주를 두고 쓴 단어 graces는 일반적인 우아함과 17세기 클라브생 학파의 표준 용어 장식음(agréments) 사이를 넘나든다 — Chambonnières가 즉흥으로 더하던 “new graces”가 바로 그 두 번째 뜻이다.)
La Tribolet는 살롱의 안주인 마담 뒤알레의 초상이다. 양손 교차와 반복음, 매혹적인 화성 진행 — 모든 것이 이탈리아풍이다. C 단조 두 번째 모음곡의 La Boucon(쿠랑트)은 1747년 작곡가 카사네아 드 몽동빌과 결혼하게 되는 클라브사니스트 안-잔 부콩(Anne-Jeanne Boucon)에게 바쳐졌다. 같은 책의 두 Rondeau는 13년 뒤 라이프치히에서 마르푸르크가 라모·페브리에의 작품과 나란히 《클라비쳄발로 신곡선집》에 재출판할 만큼 일찍부터 명성을 얻었다.
《클라브생 곡집》 2권 (1748) — 마담 빅투아르의 책
4년 뒤, 뒤플리는 두 번째 책을 루이 15세의 일곱째 자녀 마담 빅투아르 드 프랑스(Madame Victoire de France, 1733–1799)에게 헌정한다. 1738년 추기경 플뢰리의 압력으로 자매들과 함께 퐁트브로 수도원으로 보내져 교육받았던 그녀는, 1748년 — 곧 이 책이 출간되는 해 — 베르사유로 돌아왔다.
티통 뒤 티예는 “프랑스 음악의 영예를 위해 덧붙이자면, 마담 아델라이드는 바이올린을, 마담 빅투아르는 클라브생을 — 매우 잘 — 연주하셨다”고 적었다. 1751년에는 아르망-루이 쿠프랭(François 쿠프랭의 조카) 역시 그녀에게 곡집을 헌정했고, 13년 뒤인 1764년에는 일곱 살의 한 천재 아이 — 잘츠부르크의 W.A. 모차르트 — 가 자신의 첫 출판작 《바이올린 반주가 더해질 수 있는 클라브생 소나타집, 마담 빅투아르 드 프랑스에게 헌정, J.G. 볼프강 모차르트 작 Op.1》(K.6, K.7)을 같은 인물에게 바치게 된다.
2권은 1권의 알르망드·쿠랑트가 사라진 채, 각각 같은 으뜸음을 공유하는 3–4곡 단위로 구성된다. 옛 모음곡(suite)의 구조에서 벗어났지만, 그렇다고 후일의 고전 소나타의 선구자도 아니다 — 오히려 프랑수아 쿠프랭 후기 오르드르오르드르 (ordre)프랑수아 쿠프랭이 자기 모음곡 단위를 부른 이름. suite와 비슷하지만 정해진 춤 순서가 없고, 같은 토널 영역(같은 으뜸음이나 가까운 조성) 안에서 춤·성격소품(caractère)·인물 초상이 자유롭게 섞인다. 곡 수도 정해져 있지 않아 적게는 4곡, 많게는 20곡 이상까지 가능.의 성격소품 모음에 더 가깝다.
흥미로운 것은 곡 하나하나가 또다시 초상화라는 점이다. La Victoire는 헌정자 자체의 모습 — 어린 공주의 활기. La de Villeroy는 루이 15세의 측근 빌루아 공작. La de Vâtre는 클라브사니스트들의 사랑을 받았던 제작자 앙투안 바테르(Antoine Vater)의 변형된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La Lanza는 1721년 생-제르맹과 생-로랑 시장에서 오페라 코미크를 무대에 올렸던 라 랑즈를 떠올리게 한다.
《클라브생 곡집》 3권 (1756) — 헌정자 없는 걸작
3권은 네 권 중 유일하게 헌정자가 없는 책이다. 그리고 뒤플리의 최고작이기도 하다. 메르퀴르 드 프랑스는 1756년 1월호에서 “그의 재능과 공로는 너무 유명하여 어떤 칭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작곡가의 이름 자체가 곡집의 찬사다”라고 적었다.
가장 큰 변화는 바이올린이 더해진 여섯 곡이 포함된다는 점이다. 1737–38년경 카사네아 드 몽동빌의 《바이올린 반주를 가진 클라브생 소나타집》과 1741년 라모의 《바이올린과 함께하는 클라브생 곡집》 이후, 클라브생에 바이올린이 더해진 형태는 청중에게 매우 인기 있었다. 시몽 시몽이 1761년 자신의 곡집 서문에서 적은 바와 같다 — “독주 클라브생만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몇 곡에 바이올린 반주를 더했다. 클라브생의 흩어지는 소리에서는 잃어버리기 쉬운 멜로디의 매력을, 바이올린의 지속되는 화음의 소리가 받쳐주기 때문이다.”
3권의 F 장/단조 그룹은 Ouverture(서곡)으로 문을 연다. Grave – Vite의 푸가토 구조는 몽동빌의 첫 소나타 서곡을 직접 의식한 것이다. La Forqueray는 비올라 다 감바의 거장 앙투안 포르크레, 혹은 그의 아들 장-바티스트의 초상으로 추정된다. 그 뒤를 잇는 샤콘(Chaconne)은 286마디에 이르는샤콘 (chaconne)반복되는 베이스 라인 또는 화성 진행 위에 변주를 쌓는 17–18세기 형식. 프랑스 오페라에서는 종종 발레 피날레로 사용되어 라모의 《인도 갈랑트》와 《조로아스트르》 등이 거대한 샤콘으로 마감된다. 286마디는 살롱·실내 규모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길이., 프랑스 클라브생 레퍼토리에서 가장 거대한 샤콘 중 하나다 — 루이 쿠프랭이나 마르샹의 론도-샤콘과도, 헨델식의 통저음 변주와도 다르다. F 장조 → F 단조 → F 장조의 3부 구조는 오히려 라모나 도베르뉴의 관현악적 샤콘에 가깝다. 그리고 그룹의 마지막에는 Médée(메데이아) — “Vivement et fort”의 격렬한 곡. 작곡가가 평소 감미로움과 다정함으로 평가받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광기에 가까운 분노의 악구다.
3권에는 또한 신비로운 La de La Tour가 있다. 통상 파스텔 화가 마우리스 캉탱 드 라 투르에게 헌정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장-자크 루소가 자신의 정인 마리안 라투르 드 프랑크빌(Marianne Latour de Franqueville)과 주고받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서신에 따르면, Latour라는 이름을 공유하던 마리안에게 바쳐진 것일 가능성도 있다. 1764년 10월 26일 마리안이 루소에게 보낸 편지 — “어제 저는 집의 식탁에 뒤 플리 씨, 뒤 테로 씨, 브레게 씨, 그리고 그의 젊은 동행과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 에서 우리는 작곡가가 친구이자 어쩌면 제자였을 마리안의 식탁에 앉아 있는 모습을 잠시 엿볼 수 있다. 그녀의 비밀 통신을 눈치챈 뒤플리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마리안의 한마디가 그의 인격을 짧지만 깊이 전한다 — “그는 저를 잘 알기에, 아무것도 따져 묻지 않고 떠났습니다.”
《클라브생 곡집》 4권 (1768) — 작별
마지막 책은 1768년, 작곡가가 53세 되던 해, 마지막 후원자 쥐녜 후작부인(Claude-Charlotte, Marquise de Juigné)에게 헌정된다. 그녀는 뒤플리의 노년을 거두어 말라케 부둣가의 쥐녜 저택 다락 — 세 개의 방,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 에 그가 머물 수 있도록 했다.
3권에서 4권까지의 12년 사이, 뒤플리는 작곡보다는 교육으로 살아갔다. 1765년 영국 귀족 리처드 피츠윌리엄 경을 위해 통주저음통주저음 (basso continuo)17–18세기의 표준 화성 반주법. 베이스 라인 아래에 숫자를 적어 그 위에 쌓을 화성을 지시하고, 클라브생·류트·오르간·비올라 다 감바 등이 그 숫자를 보고 즉흥으로 화성을 채워 넣는다. 바로크 음악의 거의 모든 반주가 이 방식으로 적혔다. 교본을 수기 형태로 작성했고, 같은 해 클라브생 제작자 파스칼 타스킨이 림부르 기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르 투르뇌르, 발바스트르, 뒤플리, 르 그랑이 파리 최고의 선생들”이라 인정받았다. 시간당 9–10 리브르의 레슨료 — 결코 적지 않은 액수다.
4권은 단 6곡뿐이다. 같은 으뜸음을 공유하는 그룹은 없지만, 가까운 조성으로 묶인 느슨한 두 세트가 식별된다 — D 장조 / G 장조 / A 단조, 그리고 B♭ 장조 / C 단조 / G 단조. C.P.E. 바흐의 시범소나타(베를린, 1753)나 발바스트르 1권(1759)에서 본 근접조 묶기의 영향일 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더 이상 옛 사람이 아니다. 알베르티 베이스알베르티 베이스 (Alberti bass)화음을 도-솔-미-솔처럼 분산음으로 푸는 좌수 반주 패턴. 이탈리아 작곡가 Domenico Alberti(c.1710–1740)의 이름에서 따왔다. 18세기 후반 고전 어법의 표준 반주가 되어 모차르트·하이든·초기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가 거의 이 위에 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로 받쳐진 멜로디, 오케스트라적 투티를 모방하는 옥타브 도약, 8분음표 옥타브가 왼손에서 깨지는 비르투오소 구절 — 이미 고전 어법에 한 발 들여놓은 음악이다. La de Juigné의 부제 “고귀하고 다정한 양식으로(D’un style noble et tendre)”는 그 새로움의 자기 선언이다.
그리고 La Pothouïn(C 단조 론도). 카르몽텔이 클라브생 앞에 앉은 마드무아젤 피투앙과 그녀 뒤에서 비올라 다 감바를 켜는 아버지를 그린 파스텔이 남아 있다. 후렴구의 하강 반음계 베이스하강 반음계 베이스4도 또는 5도 음정을 반음씩 한 단계씩 내려가는 베이스 라인. 라틴어로 passus duriusculus(거친 걸음). 17세기부터 비탄·죽음·체념의 정서를 지시하는 음악적 비유(topos)로 굳어졌다. Purcell의 Dido’s Lament, Bach b단조 미사의 Crucifixus가 가장 유명한 예.가 자아내는 견딜 수 없는 노스탤지어, 마지막 쿠플레의 놀랍도록 아름다운 화성 — 이 곡은 18세기 프랑스 클라브생 학파 전체에 대한 작은 톰보(tombeau)톰보 (tombeau)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17세기 프랑스 음악 형식. 류트·비올·클라브생을 위한 짧은 추모곡으로, 알레망드나 자유로운 프렐류드 형식을 자주 띤다. 본문의 “학파에 대한 작은 톰보”는 결국 곡 자체가 한 음악 전통의 죽음에 부치는 묘비라는 비유.처럼 들린다.
1789년 7월 15일 — 마지막 인사
뒤플리는 1779년 베르리 거리를 떠나 토리니(Thorigne) 거리로 이주했고, 1784년 쥐녜 부부가 그에게 새로 매입한 말라케 부둣가 저택의 다락방을 빌려주었다. 그곳에서 그는 30년 넘게 그를 보필한 충직한 하인 니콜라 드포미에(Nicolas Depommier)와 함께 만년을 보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1788년 11월 27일 《주르날 제네랄 드 프랑스》에는 “한때 파리의 클라브생 선생이었던 뒤플리 씨의 안부를 알고자 한다 — 만일 그가 더 이상 살아있지 않다면, 그의 상속인의 소식을 알리고자 한다”는 광고가 실린다.
1789년 7월 2일, 그는 “몸은 병들었으나 정신과 기억과 판단은 온전한 상태로” 자신의 모든 것을 드포미에에게 남기는 유언을 작성한다. 그리고 1789년 7월 15일 — 바스티유 함락 다음 날 — 발걸음 소리도 없이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8월 21일에 작성된 그의 사후 유산 목록에는 라신, 몰리에르, 볼테르, 그리고 그의 친구 루소의 책들과, 19권의 악보가 적혀 있다. 그러나 단 하나 — 클라브생은 한 대도 없었다.
루이 14세가 사망한 해에 태어나 바스티유 함락 다음 날에 죽었다는 것은, 돌아보면 상징적이다. 그는 위대한 시대 — 결코 안일함이나 진부함을 보이지 않은 그 시대 — 의 마지막 위대한 작곡가였다. 그리고 자신은 그 다음 세상을 살아가도록 준비되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던, 한 시대의 마지막 신사였다.
1707 뒤몽, 1768 구에르만스 — 두 악기의 증언
올리비에 보몽이 플렉트라 뮤직(Plectra Music)에서 발매한 이 전집의 핵심은, 단순히 보몽의 명연 그 자체에 있지 않다. 그는 두 대의 진품 18세기 파리 하프시코드로 이 음악을 연주한다. 미국 델라웨어의 플린트 컬렉션(Flint Collection)이 소장한 두 악기다.
니콜라 뒤몽(Nicolas Dumont, Paris, 1707) — 18세기 파리 표준형 양수반 클라브생의 가장 오래된 현존 예. 5옥타브(FF–e3) 음역을 가진 최초의 모델. 1719년 마르시외 백작이 자신의 시골 영지를 위해 투베 성(Château du Touvet)에서 구입했고, 프랑스 혁명 중에는 곡식창고에 숨겨졌다 1970년대에 재발견되었다. 위베르 베다르의 1975–76년, 도미니크 라페를의 1996년 손길을 거쳐, 마지막으로 2012년 캘리포니아 버클리의 존 필립스(John Phillips)가 완전 복원을 마쳤다. 80여 년의 사용과 180년의 침묵, 세 번의 복원에도 불구하고 — 원래의 받침대와 장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 음악적으로 거의 원형 그대로의 상태다.
조아네스 구에르만스(Joannes Goermans, Paris, 1768) — 1743년부터 1773년까지 파리 클라브생 제작의 최고봉이었던 구에르만스가 “Joannes Goermans”라고 서명한 마지막 알려진 악기. 5옥타브 양수반(FF–f3)양수반 · 5옥타브 음역 · 8/4피트양수반(兩手盤, two-manual)은 두 단의 키보드를 갖춘 클라브생으로, 단마다 다른 음색을 설정하거나 두 단의 음량 대조를 만들 수 있다. FF–f3은 가장 낮은 음 큰 F(약 44 Hz)부터 가장 높은 음 작은 f‴(약 1396 Hz)까지의 5옥타브 음역 — 18세기 프랑스 표준이다. 8피트(8′)와 4피트(4′)는 파이프 오르간의 stop 표기를 차용한 것으로, 8′는 표준 음높이의 현 한 쌍, 4′는 그 한 옥타브 위에서 울리는 보조 현. 8′·8′·4′ 구성이 양수반 클라브생의 정형., 커플러, 두 개의 8피트와 한 개의 4피트 — 18세기 프랑스 클라브생 설계의 정점을 이루는 표준 구성이다. 1924년 레옹 사부아(Léon Savoye) 컬렉션 경매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2014년 같은 존 필립스의 손에서 복원되었다.
뒤플리의 1차–4차 곡집이 출판된 시기(1744–1768)가 이 두 악기가 만들어진 시기(1707, 1768)를 정확히 감싸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보몽은 각 곡의 출판 시점과 악기의 제작 시기를 의식적으로 일치시켰다. CD 라이너에 표시된 별표 (★)와 (★★)는 어느 곡이 어느 악기로 연주되었는지를 알려준다 — 역사적 정확성을 넘어선 음향적 선택이다. 1744년 1권의 새로운 유려한 알르망드는 1707 뒤몽의 섬세하고 가벼운 울림에 어울리고, 1768년 4권의 알베르티 베이스와 옥타브 비르투오시티는 1768 구에르만스의 세련되고 강력한 사운드를 요구한다. 그리고 녹음은 a¹ = 392 Hz — 곧 낮은 프랑스 피치(ton de chambre)다.낮은 프랑스 피치 (a¹ ≈ 392 Hz)18세기 프랑스 살롱·실내악에서 통용된 기준 피치. ton de chambre(실내 피치)라 부르며, 현대 표준 a¹ = 440 Hz보다 정확히 한 음(약 단2도) 아래다. 같은 곡을 392로 연주하면 색감이 부드러워지고 현의 장력이 낮아져 양·털 등 18세기 재료의 본래 음향에 한층 가까워진다. 베르사유 궁정과 오페라는 더 낮은 392 또는 그보다 더 낮은 ton de l’Opéra(약 a¹ = 392–400 Hz)를 썼다.
보몽이라는 선택
올리비에 보몽(Olivier Baumont, 1960– )은 1980년대부터 활동을 시작해, 40년 가까이 파리 음악원(Conservatoire national supérieur de Musique et de Danse) 클라브생 교수직(2001년부터)을 지내며 60여 종의 음반을 남긴 현역 프랑스 학파의 중심이다. 프랑수아 쿠프랭 전집(에라토 재발매), 라모, 샹보니에르, 다캥의 클라브생 전집들이 이미 그의 손에서 나왔다. 즉, 그는 프랑스 클라브생 학파의 처음부터 끝까지 — 17세기 후반의 샹보니에르에서 18세기 후반의 뒤플리에 이르기까지 — 를 음반으로 연결지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연주자다.
이 음반은 플렉트라 뮤직과의 4-CD 시리즈 — 플린트 컬렉션의 진품 악기로 녹음되는 프랑스 계몽기 클라브생 음악 시리즈 — 의 두 번째 작품이다. 다음은 미셸 코레트(Michel Corrette)가 예정되어 있다. 카렌 플린트(Karen Flint)가 사재로 운영하는 컬렉션, 켄 블레어의 녹음 엔지니어링, 존 필립스의 조율 —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의 음악적 비전을 떠받친다.
뒤플리는 자신의 시대에 대한 마지막 정중한 인사였다. 보몽의 이 전집은, 그 인사를 받는 우리의 정중한 답례다.
음반 정보: Jacques Duphly (1715–1789) — Complete Works for Harpsichord. Olivier Baumont, harpsichord (Nicolas Dumont, Paris 1707 / Joannes Goermans, Paris 1768) · Martin Davids, violin · Plectra Music PL22601 (3 CDs) · ©2026. 녹음: 2024년 4월 + 2025년 4월, 플린트 컬렉션 · a¹ = 392 Hz · 라이너 노트: 올리비에 보몽 · 영역: 빈센트 지루(Vincent Giroud). Plectra Music 페이지 / Brandywine Baroque 발표.